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로세로 세계사 (문단 편집) ==== 3권(중동) ==== * 석가모니가 코살라에서 태어난다고 하는데, 실제론 샤카이다.[* 정확히는 샤카 중에서도 카필라 성을 중심으로 한 나라다.] 코살라는 오히려 석가모니의 고향을 멸망시킨 나라다.[* 여담으로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 모국이 멸망했는데 그래도 모국이 멸망하는건 못 보겠던지 3차례나 코살라를 설득해 3번을 성공했지만 4번째 때는 이것이 자기네 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업이라고 여겨 막지 않았다. 참고로 당시 왕은 석가모니의 사촌이었는데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정반왕]]의 자손들이 아들인 석가모니와 손자인 라훌라를 포함 일족 상당수가 출가해버려 직계자손중에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이런 참사(?)에 석가모니도 부왕의 부탁을 받아들여 출가는 부모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계율을 세웠다.] * 매카가 힌두교와 조로아스터교 등등 세계 각지 종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의 백화점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당시 종교의 백화점 수준으로 힌두교, 불교, 기독교, 마니교, 마즈다크교 등이 번창했던 지역은 사산조 페르시아이지 메카가 아니다. 아랍 고대 신앙 관련한 기록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많이 남아있는데 여기서 불교나 힌두교 영향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 아랍인들이 고대부터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시조로 삼았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나디르 이븐 알 하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신화 이야기를 아랍인들이 우화로 여겼다는 기록도 남아있듯이 아랍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민족 감정 때문에 배격하던 상황이었다.[* 무함마드 활동기의 사산 왕조의 샤한샤였던 호스로 2세는 아랍인 왕국인 [[라흠 왕국]]의 왕을 죽이기도 했다.] * 초대 [[칼리파]] 자리를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아부 바크르]]에게 적극적으로 양보를 하여 아부 바크르가 선출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순니파의 해석이고 시아파의 해석은 다르다.[* 그리고 해석과는 별개로 이 결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알리가 무함마드의 유해를 수습하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후계자 선정 회의가 열렸다는 것이다. 당초에 무함마드 사후에 자리를 누가 이어받을지는 [[아랍인]]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는데 전통적인 관점에 따른다면 혈연에 따른 세습을 택해야 하므로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잇는 것이 당연하지만 종교적 관점으로 보면 선지자들이 혈연에 의한 세습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알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이어도 된다.][* 사실 이것 뿐만이 아니라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분열하는 무함마드 사망~우마이야 왕조 초기까지의 이슬람 역사에 대해서 수니와 시아의 시각차는 매우 뚜렷하다. 당연히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서 정통 칼리프 시대의 4명의 칼리프에 대해서도 수니파는 이들을 모두 칼리프로 인정하지만 시아파는 알리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찬탈자 수준으로 저평가하며 당연히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평도 나빠서 예를 들어 아부 바크르의 딸이자 무함마드의 아내인 아이야에 대해서 수니파에서는 '믿는 자들의 어머니' 라고 극찬하지만 시아파에서는 무함마드를 독살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로 극악한 인물로 평을 받는다.] 시아파 측에서는 알리가 [[무함마드]] 사망 직후 [[무함마드]] 장례를 수습하느라 바쁜 사이 아부 바크르 측에서 [[날치기|기습적으로 회의를 열어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를 선출한 것이다.]][* 단 순니파에서도 두 사람간에 불화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순니파는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만 언급하지만 시아파에서는 아부 바크르가 알리에게 "네 집에 불을 지르겠다!" 라고 협박했다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은 이 때부터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아부 바크르가 칼리파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각자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내세우면 독립하려는 반란이 터지자 알리 지지파 역시 일단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로 인정하고 반란부터 진압하자고 타협을 봤기 때문이다. 오히려 알리가 적극적으로 칼리파 자리를 양보했을 때는 아부 바크르 사후 2대 칼리파로 [[우마르]]가 선출됐을 때였다. * 이 외의 [[정통 칼리파 시대]]의 알리를 두고 일어난 칼리프 자리 분쟁도 사실 책에서는 간략하게 축소되었다. 책에서는 그저 자리 싸움 정도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무함마드 사후 진행되기 시작한 이슬람의 세속화와 이에 대한 반대의 충돌로서 단적으로 무아위야 1세가 속한 쿠라이시 가문이 알리에게 대항한 이유도 전임 칼리프인 우스만이 속한 우마이야 가문이 바로 쿠라이시 가문의 일부였고 우스만은 자기 혈족 즉 쿠라이시 가문을 지나치게 싸고 돌았다. 당연히 우스만 시기에 쿠라이시 가문은 엄청난 세도를 누렸는데 이슬람의 순수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외치는 알리가 칼리프가 되면 그 세도가 없어질 것이니 알리에게 반대한 것이다. * [[카르발라 참극]]에 대한 묘사가 너무 단편적이다. 일단 책에서는 야지드 1세는 아버지인 무야위야 1세로부터 정당하게 자리를 물려받은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이 때까지도 칼리프는 세습되지 않는다는 개념이 남아있어서 야지드의 정통성도 애매했다. 즉 책에서 후세인 일파를 향한 '반역자' 운운은 지나친 감이 있다. 또한 후세인이 자살했다고 했는데 후세인은 자살하지 않고 전투 중 전사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서 너무 의미없이 넘어간 것도 있는데 카르발라 참극은 [[시아파]]가 본격적으로 발족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전부터도 알리 지지/반대에 따라 분열 조짐이 보이고 있었지만 이 사건에 이르러 알리 지지파는 시아파라는 세력으로 변모하였고 그 반대파인 수니파와 1400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대립하는 계기가 된다. 구체적으론 시아파에서 중요한 종교축제인 [[아슈라 축제]]나 [[마흐디]] 사상이 모두 카르발라 참극에서 기원한다. 또한 이 사건은 갓 출범한 [[우마이야 왕조]]를 크게 위협했다. 안 그래도 칼리프는 세습되지 않는다는 개념을 박살내고 야지드 1세가 세습해서 문제가 안 생길 수 없는 상황에서[* 애초에 알리 반대파의 논거는 딱 하나 예언자의 후계자는 세습되지 않는다인데 야지드는 이를 세습함으로서 명분을 깨먹었다. 시아파도 알리의 자리를 빼앗고 알리의 후계자에게 돌아가야 할 자리를 빼앗았다며 그런 우마이야 가문이 아바스조에게 멸족당하다시피 한 것은 당연한 응보라고 여긴다.] 무려 '''예언자의 외손자와 그 지지자이자 일족을 학살함으로서'''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민심은 개박살이 나버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야지드의 등극을 인정했던 [[이븐 주바이르]][* 알리 생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알리와 대립했지만 아버지의 사후에는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을 지지하였다.]는 입장을 바꿔 후세인의 죽음을 [[순교]]로 선포하고 [[2차 피트나|야지드에 반기를 들었고]] [[메디나]]가 이에 호응하였다. 거기다가 야지드가 이븐 주바이르를 잡겠다고 메카에 군대를 보냈다가 카바 신전에 불이 나서 민심이 더욱더 악화되었다. 결국 야지드 1세는 카르발라 참극 후 겨우 3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은 [[무아위야 2세]]때는 칼리프직을 포기하려다가 1년만에 죽었다.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린 우마이야 왕조는 한때는 가문의 본거지를 제외한 모든 영역을 상실하다시피 했고 결국 무야위야 2세가 죽고도 8년이 지나서야 우마이야 왕조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즉 야지드 1세의 삽질이 갓 성립된 우자이야 왕조를 끝장낼 뻔 했던 셈.[* 이렇게 무아위야 1세와 야지드 1세 모두 이슬람의 분열에 기여했다 보니 알리 말고 무함마드 후계자는 없다는 시아파에서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과 함께 평이 매우 좋지 않지만 수니파에서도 무아위야 1세는 이슬람을 왕정화시켰다고, 야지드 1세는 이슬람을 완전히 분열시켜버렸다고 좋지 않게 보는 사람이 있다. 특히 카르발라 참극에 있어서만큼은 수니파에서도 불행한 일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 아브드 알라흐만이 스페인으로 피신한 이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라는 칭호에 대항에 스스로 에미르라 칭하니'라고 되어있는데, 에미르는 엄밀히 말해 장군, 사령관 정도로 칼리프보다 한참 낮은 직위로서 아바스 왕조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선택한 것이지 대항하려고 선택한 직위는 아니다. * [[우마이야 왕조]]가 프랑크 왕국과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국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서술이 나오는데, 우마이야 왕조가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손실한 병력의 수는 [[하자르 칸국]] 및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손실한 병력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고 제국의 변두리에서 일어난 일인만큼 그 중요성도 더 적었다. 다만 우마이야 왕조는 본디 우마르 2세 사후(720년)부터 쇠퇴하고 있긴 했다. * [[아바스 왕조]]가 몽골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했다고 기술했는데 사실 단 3년만에 [[맘루크]]에 의해 카이로에서 다시 부활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맘루크에 의한 부활인 만큼 멸망때까지 아바스조의 칼리프들은 맘루크들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맘루크들이 칼리프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는 것도 옳지 않다. 맘루크 왕조 시기에도 칼리프 자리는 아바스조가 가지고 있었고 맘루크들은 술탄 자리만 놓고 싸웠다. 그래도 칼리프가 맘루크들의 꼭두각시라서 그런지 칼리프들도 260년 남짓한 기간동안 17명이 맡아 했는데 이 중에서 1명은 두 번을 재위했고 6명은 10년도 재위하지 못했다. 그래도 맘루크 왕조의 술탄 계보와 비교하면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다. * 십자군 전쟁을 중동에선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정도로 취급한다고 서술한 것이 잘못된 내용이라고 지적되었는데 이는 틀린 내용이 아니다. 당시 십자군의 활동영역은 아나톨리아-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같은 동지중해 권역이 중심이라 아라비아 반도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볼 일이 거의 없었으며 후대의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잊혔으나[* 토머스 매든도 자신의 책에서 이 설을 주장했다.][* 십자군 자체가 특이한 일이라 치부하기엔 이슬람 세계의 최전선에서 기독교 세력과 부딪히는 건 흔한 일이었다. 당장 그들의 최대 적수였던 동로마부터가 기독교 국가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레콩키스타가 벌어지는 등 십자군 전쟁 당시 아나톨리아, 레반트와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입장에선 기독교 세력과의 최전선이었다. 당대 중세 이슬람에게 십자군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전방에 그냥 또 다른 기독교 세력이 침공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동 지역의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되고 유럽인들이 이를 제2의 십자군의 성공이라고 기념하면서 오히려 아랍 쪽에서도 십자군을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종합하자면 '''현대의 중동인'''들은 십자군을 변방의 사건으로 여기지 않지만 십자군 전쟁 당시의 이슬람 세계는 분명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가 중심지였던 만큼 '''십자군 전쟁 당시의 중동인'''들의 시각에선 변방의 싸움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종교적 관점에서는 변방의 소란으로 보긴 어려운데 십자군의 목표는 이슬람의 3대 성지중 하나인 예루살렘이며 십자군 전쟁 기간동안 이슬람은 2세기 가까이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에게 뺴앗겼다.] 원래 서술에서도 십자군 전쟁 당시의 중동인들의 시각을 이야기하는 거지 현대의 시각은 현대 중동세계 파트에서 소개하고 있다. 다만 서술이 좀 불명확해 원래 의도를 오해할 여지는 있다. * 그리스인들은 우주를 관념적으로만 다루었고 이슬람은 실제적인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도 오류, 정확히는 그리스인에 대한 말이 오류다. 물론 그리스인들이 관념적으로 다룬 편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수준을 감안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8세기에 시작되었고 기원후 6세기까지 지속되었지만 기원전 2세기 중엽에 로마에게 정복당했다. 그리고 우리가 주로 다루는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4세기까지다. 정말 넓게 취급해줘서 기원후 6세기까지 넓혀도 이슬람이 등장하는 시기와도 1~2세기의 차이가 있고 어차피 로마에 의한 정복 후 그리스의 처지는 많이 굴러떨어졌고 이슬람의 황금기도 8~13세기이니 결국 기원전 8~2세기까지의 그리스와 8~13세기의 이슬람과 비교해야 하는데 이 시간차이가 최소 '''천년'''이다. 즉 시간차와 시대차를 감안해야 한다. 그 시간동안에 기술적, 학문적 발전의 수준이 있는데 이슬람의 연구를 놓고 고대 그리스인들의 연구를 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작 그 이슬람도 고대 그리스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성공을 이루어낸 것이다. 또한 철학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한게 고대 그리스 시대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우주나 자연 등에 대해서 그전까지는 신이 창조했다라는 정도로만 끝나던 시대에서 왜 어떻게 생겨났고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등을 처음 연구하기 시작한 때가 이 때다. 허나 앞서 말했듯 당시 수준이 수준인 만큼 이럴거다 저럴거다 하는 가설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었다. 당장 [[4원소설]] 같은게 16세기 같은 이슬람의 황금기가 지난 시점에서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방법으로는 원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현미경은 16~17세기에 나왔고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돌턴에 의해 발견되어 입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대 그리스인이라고 말로만 우주를 다루거나 한건 아니다. 좋은 예시로 지구 지름을 구한 에라토스테네스는 태양의 각도를 이용해 지구의 지름을 쟀고 그 값이 완전히 맞는건 아니었지만 원리 자체는 맞다. 그리고 실제로 그 거리까지 가보기도 했고. * [[바이바르스]]가 현재 [[튀르키예]] [[셀주크 제국]]의 군주로 소개되어 있으나 사실은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군주였다.[* 이 부분은 [[미래엔]](舊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서 나온 중동사나 터키사 같은 기초적인 세계사 교양 도서만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인데, 바이바르스 개인이 튀르크인이라는 것 하나만 보고 주화입마에 빠진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바이바르스가 지중해 일대의 십자군을 깡그리 몰아냈다는 보였다.] * [[셀주크 제국]]의 몰락이 몽골의 [[티무르]] 때문이라고 서술되었는데 셀주크 제국의 몰락은 칭기즈칸 시기보다도 앞이다. 셀주크 제국의 몰락의 시발점은 [[요나라]] 멸망 후 서쪽으로 이주한 잔당세력인 서요에 의해서가 컸다. 사실 이건 비단 먼나라 이웃나라 뿐만 아니라 WHY 시리즈를 비롯한 세계사 만화 등지에서도 몽골의 침략으로 셀주크 튀르크가 멸망했다는 식의 오류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 * "~[[스탄]]은 이슬람 국가라는 뜻"이라는 잘못된 설명이 나오는데 스탄은 페르시아어로 땅이라는 뜻이다. 국가에만 사용되는 단어도 아닐 뿐더러 이슬람과 관계없는 지역 지명 접미사에도 흔하게 쓰인다. 중세 불교를 믿던 [[토하리스탄]], 힌두교도들이 주로 거주하는 [[라자스탄]], [[스톡홀름]]의 구시가지 감라스탄,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흑인 게토 [[반투스탄]] 등이 있다. *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와 세력권을 형성하는 것은 티무르에게 쫓겨나서 도망치듯 온 것이 아닌 셀주크 투르크 이후 지속적으로 동로마 영토였던 아나톨리아 반도에 침입, 그곳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정복하러 나선 상황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티무르에게 크게 당한 전투가 이루어 진 곳도 [[앙카라 전투|앙카라]], 즉 아나톨리아 반도 한 가운데였다. 작중 내부에서도 티무르에 쫓겨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온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에서 강성해진 후 티무르한테 당한다는 모순을 보인다. * 오스만의 마지막 칼리프가 메메드 6세라고 나오는데, 1922~1924년까지 재위한 압뒬메지드 2세가 마지막 칼리프다. 20권인 오스만제국과 터키 편에서 수정되었다. * 팔레스타인 제1차 인티파다 부분에서 1987년 12월 16일에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인 사업가가 피습당하자, 며칠 후 팔레스타인 청년 4명이 이스라엘 군용지프에 치여 죽어서 생긴 계기라고 나왔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건 미리 계획된 보복이다!"라고 분노했다.] 실제로는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 트럭과 팔레스타인 승용차가 충돌한 사건으로 인해 터진 것이다. *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아랍 국가는 [[요르단]], [[이집트]]뿐이라고 하는데 [[아랍에미리트]], [[수단 공화국|수단]], [[바레인]], [[모로코]]도 인정했다.[* 참고로 네 개 나라 모두 공통적으로 극단주의와 근본주의가 범람하는 이슬람권에서 그나마 덜한 나라들이다. 특히 모로코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뿌리뽑으려고 온건 이슬람을 지향하는 [[수피즘]]을 지원하고 있다.] 단 이 네 나라는 2020년에야 인정했기에 최종 개정판인 2018년판까지는 당연히 개정되지 않았음을 인정하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